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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안아 줘by 미자 at 09:24 꼭 안아 주고 싶다... by BWV817 at 12/02 ㅇㅇ 더 좋은 조건이지.. by 미자 at 11/23 ㅇㅇ 나도 너구리랑 동일.. by 미자 at 11/23 적어도 미자는 엄마의 .. by 너구리 at 11/22 근데 회사에서 사람이 .. by 너구리 at 11/22 전문가라니요. 민망합.. by 미자 at 10/27 감사합니다^^ 저는 이.. by 저도 기획자^^ at 10/05 제품이 좀 커서 C++ H.. by 미자 at 09/28 개발기획 8년 이시라니 .. by 저도 기획자^^ at 09/25 최근 등록된 트랙백
죽음의 행진by The note of Legendre 옛날 옛적에 by 왜 하필 미자인가? 머리가 사고치는 회사도.. by Preserve myself in spi.. 개발자의 실수.. by 미친병아리가 삐약삐약 첫 번째 줄 by Preserve myself in spi.. |
전통 이불색은 녹색과 빨강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전통 이불색이 녹색과 빨강의 두가지 천으로 된 건 조선시대 인선왕후 때였단다. 인선왕후가 궁의 이불 색을 녹색과 빨간색으로 바꿨는데, 그것이 유행을 타고 대가집들 이불색이 녹색과 빨간색으로 바뀌더니 그것이 또 유행을 타서 일반 백성들의 이불색도 녹색과 빨강으로 바뀌었단다. 그런데 왜 녹색과 빨강이었을까? 그건 조선시대 군복색이 녹색과 빨강이었기 때문이었단다. 암튼, 인선왕후는 청나라를 칠게 될 때를 대비해서 군복재료를 잘 확보했단다. JP모건 대학 시절 모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JP모건은 태국 바트화에 투자를 엄청했는데 95년부터 태국경제가 나빠져서 손실도 엄청나게 발생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JP모건은 바트화의 위험을 예쁘장하게 생긴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팔았단다. 한참 파생상품이 유행을 타던 때라 우리나라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많이 샀단다. 그 상품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바트화 환율이 변하지 않을 경우 97원을 내면 나중에 100원을 받게 되는데, 지금 97원 중 일부를 또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게 아니었던 것 같어.. 이 상품(태국바트화)을 사라. 내가 돈 빌려주겠다. 100원. 난중에 97원만 갚아라 구조였던 것 같다. 아 헷깔려. 간단한 것도 가물가물하네. 관심있는 사람은 구글에서 "다이아몬드펀드"로 검색...) 좀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미자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아래 내용은 정확치 않음.) 태국바트화 환율이 변하지 않으면 간단하게 설명한 내용대로 되고 바트화 환율 변동을 인도네이아 루파아의 채권으로 헤지를 해서.. 어쩌고 저쩌고 암튼 JP 모건은 이 상품을 엄청 잘 팔아서 위기를 잘 넘겼단다.
미자가 여섯살 때인지 일곱살 때인지
엄마가 미용실을 시작하셨다. 동네에 미용실이 없어 30분쯤 걸어가야 하는 옆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익히셨다, 몇 달이 지나 시장 외각의 건물 2층에 있던 목용탕 바로 옆에 미용실을 내셨다. 의자 2개짜리 쬐끄만 놈이었다. 그것 때문에 엄마랑 아부지랑 많이 다툰걸로 안다. 은행 여직원들도 결혼하면 은행을 그만둬야만 했던 시절. 결혼한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거 받아들이기 쉽지 않던 시기에 그것도 고지식한 경상도 시골 출신 우리 아부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단호했던 엄마의 고집을 미자랑 똑같이 고집불통인 우리 아부지도 결국 못꺽었다. 지금은 발견하기도 힘든 이발소가 대세던 시절 여자들이 돈 주고 머리하면 욕먹던 시절 돈 주고 머리할려고 해도 미용실 찾기 어렵던 시절 드라이어도 없었다. 전기 고데기도 아니고 그냥 쇠로만 된 고데기를 불에 달군 후 물수건으로 적당히 온도를 조절해서 사용했었다. 집에서도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찜솥에 물을 끓여 쓰던 시절 미용실의 모든 일들은 불편했다. 하지만 엄마의 선택은 제대로 였던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확장 이전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엄마는 그곳에서 일을 하셨다. 그 때는 미용산업이 무지 발전하던 시기였다. 동네 곳곳에 미용재료상이 들어섰고 드라이어도 나오고 스프레이도 나오고 미용사 한 두 달 급여 값의 가위도 볼 수 있고 나이아가라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파마도 계속 등장했다. 피부 관리도 시작되고 눈섭 문신도 그 때 등장한 거 같다. 미용실은 말 그대로 바글바글 해졌다. 몇 시간 기다리다 머리하실 포기하는 손님도 생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손님들은 매일 매일 미용실을 왔다. 매일 매일 드라이를 하고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파마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손톱 손질을 했다. 파마를 하지 않은 머리는 드라이로 모양을 내기 힘들고 손톱 손질을 하다가 안 하면 손질을 전혀 안 할 때 보다 더 지저분하기 때문이었다. 말이 안 된다 생각될 꺼다. 지금도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매일 매일 미용실 가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지방 시장통 미용실을 그것도 그 옛날에 매일 매일 미용실을 가는 사람이 있다고? 있었다. 술집 언니들. 아시안 게임과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지방의 쬐끄만 괴정 시장에도 나이트 클럽이 2개나 생겼다. 일반 술집도 룸살롱처럼 영업이 가능 시절이라 룸살롱은 없었으나 룸살롱 같은 술집은 계속 생겼다. 아저씨들 놀거리가 없어서 였을까 시장에서 돈 잘 벌던 가게 사장님들은 나이트를 포함한 술집으로 놀러가는 게 일상이었고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술 값을 대 내는 한이 있더라도 돈 없는 사장님들을 이끌고 가기까지 했다. 통이 큰 나이트나 술집 손님들 덕일까 그곳에서 일하는 언니들도 통이 컸다. 그 덕에 엄마 미용실도 잘 나갔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 엄마 미용실은 또 한 번 확장이전을 했다. 새 건물 2층 1층엔 4개의 상점이 있고 지하엔 가라오케 2층엔 엄마 미용실 3층엔 건물 주인대신 건물을 관리하던 아저씨의 가족이 살았다. 엄마는 엄마 이름을 간판에 걸었다. 땡땡땡 미용실 지금은 땡땡땡 헤어샵, 땡땡땡 미용실이 흔하지만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기존 고객들을 2층까지 오게 하기 위한 엄마 나름의 해결책이었는 지 엄마의 명예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는 지 알 길은 없으나 몇 년후 이름을 단 기업형 미용실이 하나 둘 씩 생겼던 걸 보면 결과적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결정이었던 것 같다. 암튼 잘 나갔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범죄와 전쟁 선포.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유흥업소 허가 안 해주기 술집에 문 달린 방을 만들지 못하기 12시 이후 모든 가게 문닫기 규제의 핵심 목적이던 나이트를 비롯한 술집들은 당연히 타격이 컸다. 몇년 버티지도 못하고 문을 닫았으니 말이다. 술집 언니들 주머니가 가벼워지고 새벽까지 장사하던 포장마차들도 사라지고 우리 엄마 미용실도 사정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또 바뀌더라. 술집 언니들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자 미용실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 주부들이 미용실을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3천원, 5천원의 드라이 위주의 언니들은 가고 2만원 3만원의 파마 위주의 아주머니들이 오고. 커트 위주의 학생들도 오고 염색 및 기타 등등을 원하는 다양한 고객들이 생기고 넓어서 쾌적한 미용실 상업지역 입구의 좋은 위치 그 미용실 덕에 우리 집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었고 내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게 해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거기까지 였다. 개인이 잘 할 수 있던 시기가 저물고 미용실도 기업형으로 변신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으나 그 변화를 미리 읽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미용실을 보면서 체인점 형식의 미용실의 등장을 보면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변화의 방향을 인식했었나 보다. 엄마는 경영을 위한 대학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더 일찍 듣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우리 엄마는 가게의 사장님이 아니라 회사의 사장님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 미자랑 다르게 뭐든 제대로 하던 사람이니 통도 크고 겁도 없고 카리스마도 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꼼꼼하던 사람이니 시작이 늦었어도 상관없이 잘 했겠지 하지만 이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가면 괴정시장이라는 곳이 있다. 엄마랑 아빠랑 그 곳에서 쭉 장사를 했었고, 초등학교 시절
그런데 그 때 나는 역시나 초딩. 그런데 지금은 역시 미자. 상설시장을 TV나 신문에서 재래시장이라고 부른 게 한참 되었는데 이미 3일 장은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결론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 경제가 어려워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건 맞지만 시장과 함께 흥했다고 시장이 없어지고 마트만 남으면
며칠 전에 아는 분께 전화를 걸었다.
일 때문에 몇 년 전에 알게 된 분이다. 정확히는 몇 년 전에 몇 번 만나본 게 다인 분이다. 하지만 사장님이면서 실무도 잘 아시는 분 경쟁사와도 협력이나 상생을 추구하는 분 한 분야에 매진하고, 상황이 어려워도 지속하고, 그 결과 이제는 그 분야에게 인정받고 있는 회사의 사장님. 겉에서 본 바가 다이지만 사업가로서 그 분의 행보가 참 좋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만남을 청했다. 회사 초기에, 사업 초기에 어떤 고민을 하셨고, 어떤 상황을 겪으셨고, 어떤 판단을 하셨었는 지 과거가 궁금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닌 데 조언을 구하면 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너무나 흔쾌히 만나주셨고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유용할뿐만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한 만남. 농담 아니고, 며칠 지난 후인데도 지금도 고마워서 심장이 간질 간질한다. 회사의 목표는 참 많고 다양하고 산만하다. 전 구성원이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기 때문이고 한 구성원도 여러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목표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우리 회사의 목표도 참 많았다. 하지만 전 임직원의 공통된 뚜렷한 목표 및 관심사를 꼽으라면 급여였을 것이다. 초반엔 이번 달 급여 확보됐습니다란 소식에 매달 매달 환호했다. 그 이후엔 3달 동안은 급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란 식으로 기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진 목표가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그냥 가장 기본적인 문제 정도.. 그런데 말이지 나는 내 목표가 사람인 줄 알았다. 회사나 조직은 사람으로 움직인다. 계획, 비전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들로 채워라. 그럼 계획, 비전은 그 사람들이 알아서 세운다. 읽은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나는 납득했고, 믿었고, 그렇게 주장하고 외쳤다. 그런데 말이지 아니더라. 이 사장님과의 대화를 반추해보니 나는 사람이 중요하다 말만 한다면 이 분은 실천하더라. 사람이라는 조건에 맞췄서 나머지 조건들을 재단하고 조정하고 맞추시더라. 기술 좋지.. 제품 좋지.. 하지만 사람만 좋으면 나머지는 우찌되도 크게 상관없어 하는 것 같더라. 미자는 말이지 사람이 중요하다 이야기는 했는데 인력 충원은 자금 여력에 맞춰서 회사간 협력은 상황과 조건에 맞춰서 기타 등등 항상 사람을 보기 전에 조건을 먼저 봤다. 그 조건들 중에 제일 먼저 돈을 봤다. 사람됨을 따지는 사람을 만나면 그 상대도 사람됨을 따지고 조건을 따지는 사람을 만나면 그 상대도 조건을 따지게 되는 게 아닐까? 결론: 미자는 한심한 어린애. 아직 어른될라면 멀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한 학기 후 하숙집에서 살았다. 그 이후 하숙집을 옮기고, 같은 하숙집서 방을 옮기고, 또 하숙집을 옮기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버지니아주에서 한 6개월 살다가 메릴랜드 주로 옮겼다가, 다시 한국에 와서 하숙집에 살았다. 그 이후 하숙집이 이사가서 월세집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 월세 집으로 옮겼다. 내 나이 20살부터 지금까지 10개의 집에서 살았다. 회사는? 미국에서 회사 2군데(위치만으로는 3곳), 알바 2군데(횟수만으론 3곳) 한국에서 회사 3군데, 첫번째 회사: 방배동 --> 양재동 --> 여의도 --> 구로디지털1단지 --> 구로디지털 1단지 두번째 회사: 구로디지털 1단지 --> 가산디지털단지 세번째 회사: 성수동 뚝섬역 --> 강동구 강동구청역 그런데.. 다들 나보고 참 질기단다. 한 곳에 무지 오래 있는단다. 이사는 가는데.. 하숙집 주인따라, 친구따라 지인따라 회사따라 집주인 사정따라 뭐 다 그런 식이어서다. 암튼 이래저래 옮겨 다니다 보니 실제 산 곳보다 집 값 알아보러 다닌 곳이 더 많다. 결론: 부동산은 동일 품질인데도 주인이 다르면 가격 5% 왔다 갔다 하는 거는 일도 아님. 같은 빌딩에서 1억 5천과 1억 2천만원짜리 물건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소리임. (미자가 1억 2천~5천 짜리 집을 알아봤다는 건 아니고..) 심지어 싼 놈이 더 좋은 경우도 왕왕있고. 두 세달 공실 감수하고서도 명목 임대료(월세)를 안 낮춰서 매매가 높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동네에서 부동산에 등록한 날 바로 계약되는 집으로 유명한 곳도 있다. 결론 2: 임대할 땐 공실로 남아있는 곳은 왠만하면 안 구하는 게 좋은 것 같다. 기왕이면 부동산에서 "좋은 곳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나갔다." 와 같은 조건으로 등록해놓고 원하는 물건 나올 때까지 기달렸다가 후딱 계약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집구할 때 바가지 쓰면 오래 오래 두고 두고 괴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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